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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밥상 여행


양은밥상에 내온 작은 우주

화천 병풍쌈

글/사진_손현주(음식 칼럼니스트)

별빛이 길을 안내하던 산골짜기에도 전깃불이 밝게 들어오고 핸드폰이 펑펑 터지니 ‘궁벽한 오지’가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깊은 산에 숨어들어 사나흘 세상을 잊고 싶을 때가 있다. 나룻배를 타고 들어가면 더 좋겠다. 걸어온 내 흔적을 지울 수 있으니까. 산이 가로막아 한나절은 걸어야 닿는 곳이면 좋겠다. 중간에 맘 바뀌어도 돌아오지 못하게. 구들에는 장작을 밀어 넣고 주고, 산 쪽 으슥하게 자리 잡은 화장실이 무서워 밤이면 풀숲에 실례를 하는 곳. 허나 아침이면 내 어머니를 닮은 촌부가 조물조물 열 두 가지 나물을 무치고 된장찌개 바글바글 끓여 한 상 내오는 곳. 처음 보는 주인집 아저씨와 오래된 식구처럼 숟가락을 같이 담그며 된장 뚝배기를 헤집는 곳.

비수구미 집 ▲ 비수구미가는 길 민가. 고향집처럼 정취 가득하다.

그렇게 궁벽한 오지와 치유의 밥상을 떠나온 곳은 화천 속의 오지 마을, 비수구미(정확한 주소는 강원도 화천군 동촌2리)다. 오죽하면 호랑이 소동으로 마을이 알려졌을까. 화전을 일구고 나물을 뜯고 뱀을 잡아 생계를 이어가던, 자연이 전 재산인 동네인데 최근 트레킹 코스가 생기면서 제법 입소문이 났다. 9년 전 내려온 도회지 댁 혜자씨만 빼면 나머지 세 가구는 토박이다. 그 덕에 난 여인들이 억척스럽게 따낸 산채 밥상의 호강을 누린다.

해가 가장 먼저 뜬다는 해산의 발목, 비수구미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최북단이면서 가장 길다는 해산터널(1,986m)을 지나 구절양장 아흔아홉 구비를 내려가다 강 옆 비좁은 비포장도로를 따라 20여분 갔을까. 길이 끊겼다.
강 건너에 매어놓은 빈 배로 보아 강을 건너야 마을로 들어서지 싶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걸 보니 심사가 예민해졌다. 차에 옷가지를 다 놔두고 카메라 렌즈 가방만 달랑 메고는 산 위쪽으로 개통한 소위 ‘올레길’로 접어들었다. 산길을 20여분 걸으니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숨을 내놓을 무렵 ‘출렁다리’가 보인다. 정면과 오른쪽 달랑 두 집이 있는데 다리 건너 첫 집이 이장님 댁이다. 간밤 비로 계곡 물이 제법 불었다. 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예약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무작정 숨어든 것이다. 비가 와 길이 패여 난장인데 다 헤치고 산을 넘어 온 여인을 본 이장 부부는 할 말을 잃은 듯 하다. 마루로 올라서며 밥을 주어야 하고, 잠도 자야겠다고 생짜를 놨다. 일순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난 안방에서 커피를 얻어 마신 것으로 하룻밤 허락 받았다고 간주했다.

배낭을 내려놓고 열목어가 노닌다는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 들꽃이 간간이 피어있고 개울은 제법 폭이 넓다. 바위에 부딪히는 포말은 한기를 느끼게 했다. 한 시간쯤 돌고 오니 부부는 각자의 산골살림을 챙기느라 분주하다. 불쑥 들이닥친 불청객이 행여라도 춥지는 않을까 남편은 비워 둔 골방에 장작을 밀어 넣고, 적당히 탄 나무는 불기를 재워 숯을 만들었다. 아내는 좁은 부엌에서 종종걸음이다. 가끔 장독대를 다녀오고 들기름병 간장병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나물을 무치는 모양이다. 된장찌개가 바글바글 끓는다. 여섯 명은 앉을 것 같은 둥근 ‘양은밥상’이 안방으로 들어왔다. 가운데 찌개가 놓이고 찬은 비린 것 한 토막 없는 모조리 나물이다. 입이 떡 벌어진다.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숟가락을 든다.

“병풍쌈은 해발 1,000미터 이상 깊은 곳에서 자생해요. 약간 습하고 그늘진 곳을 좋아해서 여성들은 접근하기조차 힘들어요. 각종 비타민과 섬유질이 많아 피부미용에 좋다고 하죠. 따놓기 무섭게 팔려 나가요. 밥상에 올라온 나물은 다 집 주변에서 채취한 거예요. 갓 딴 나물의 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좋아요.”

그러고 보니 환갑이 훌쩍 넘은 이장 김상준씨(67)의 얼굴은 장판처럼 팽팽하다. 열 살은 젊어 보인다고 너스레를 떨었더니 부부는 “산나물만 먹어서 그렇다”고 활짝 웃는다.

약속 없이 들이닥친 손님이라 찬 걱정을 하더니만, 다음 날 아침 밥상은 나물이 더 늘었다. 데쳐서 들기름에 무치고, 볶고, 조물조물 나물 찬이 12가지다. 집 두부를 숭덩숭덩 넣고 직접 발효시킨 청국장이 올라왔다. 20년간 지켜오던 아침 단식 선언이 무너졌다. 이 정갈한 나물 밥상을 보고 어찌 식탐이 안 생길까. 밥 두둑하게 먹고 마루에 앉아 건너편 산을 바라보고 있자니 신선이 따로 없다.

아주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우체국 일을 겸하는 이장님을 따라 강가로 나왔다. 봄볕 좋은 날, 장을 담가 항아리에 다독거려놓고 깊은 산중 그윽한 산채를 따다 쌈을 싸 먹는 소박한 영혼의 음식. 도시의 독기를 빼기 위해 단 며칠이라도 그 산중 밥상과 마주하기를 넌지시 권해본다.

<강원 화천 계절 맛집>
해산민박 이장댁(김상준, 033-442-0962, 산채밥상, 닭도리탕),;
만동이네집 민박(김영순, 033-442-0145, 산채밥상, 붕어찜 등 민물생선요리), ;
비수구미 산장 펜션(이혜자, 033-442-0994)

글을 쓴 손현주는 음식 칼럼니스트이자, 여행 작가 겸 사진가로 20년간 잘 다니던 신문사에 홀연히 사표를 내고 2010년 안면도로 귀향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집에서 글을 쓰고 섬을 떠돌며 사진을 찍는다. 그녀는 앞으로도 꾸준히 책을 읽고 쓰며 사진을 찍는 삶을 꿈꾼다. 지은 책으로는 신작 『열두 달 계절 밥상 여행』을 비롯하여 『와인 그리고 쉼』, 『태안 섬 감성 스토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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