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밥상 여행


樂이 되고 藥이 되는 나물밥상

해남 사찰음식

글/사진_손현주(음식 칼럼니스트)

숲은 늦은 동백이 떨어져 문드러지고 자고새 울음이 연두색처럼 번진다. 햇 차를 따기 시작하는 곡우(穀雨)가 며칠 전 지났다. 그 차를 곱게 봉헌하는 다례제가 열리던 강진 백련사 기와지붕의 촉촉한 봄 냄새를 떠올려 본다. 이즈막 비는 참으로 고마운 비다. 여연스님의 우전차(雨前茶)를 마시며 강진만을 내려다보는 그 자오록한 시간의 경계가 안개처럼 꿈결같다. 그 만(灣) 줄기와 닿는 곡우 무렵 풍경들이 산바람처럼 스친다. 이즈막 남쪽에서 올라간 조기떼는 충청도 바다 어디쯤엔가 머물러 있을 것이고, 농부들은 논에 물을 대며 못자리 볍씨를 뿌릴 것이다. 차 밭을 에두른 만덕산 나무들은 물이 올랐다. 산나물 잎이 단단해져 가니 절집 행자들 맘은 덩달아 바쁘다. 나물을 데쳐 말리거나 장아찌로 저장을 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다례제의 부산함이 지나고, 얼마 후 다시 절집을 찾았다. 공양간 장독대는 볕이 넘쳤다.
산에서 꺾어 온 고사리며 버섯 등 나물들이 정갈하게 말려지고 공양주보살은 금방 따왔다는 조금 센 엄나무 순을 다듬고 있었다.

점심 공양시간. 발우에 나물을 담아놓고는 툇마루에 펼쳐진 절집 풍경이 하도 고즈넉하여 밥 식는 줄 모르고 생각에 잠긴다. 봄날의 절밥이 이렇게 맛있을 줄은 나이 들어서야 알았다. 참나물, 두릅, 고사리, 어수리, 씀바귀, 세발나물, 취나물, 방풍나물... 손으로 우둑우둑 뜯어 연두색 산을 올리는 이 절집 밥상을 건너뛰고 어찌 봄 밥상을 얘기할 수 있을까. 언 땅을 뚫고 올라온 생명의 에너지 그대로다. 나물 한 젓가락에, 쓱쓱 비빈 나물 비빔밥에는 봄의 우주가 담겨있다. 기름지거나 인공조미료 범벅인 속세 음식과는 달리 된장에 조물조물 무쳐 먹고 나면 금세 속이 편안해진다. 그래서 단순하게 제철재료로 순한 맛을 내는 절밥을 자연보약으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 몸을 단아하게 하고 이 순한 밥을 먹는 일상의 의식은 순리를 존중하는 치유의 시간이며, 불가에서 음식을 ‘약’이라고 여기는 포괄적인 이유다. 음식에 심성이 담기기 때문이다.

남쪽은 꽃이 지고 푸른 잎이 나오기 시작했다. 봄기운을 먹을 수 있는 나물밥상은 길지 않다. 근래에는 시설재배를 통해 계절 개념이 불투명해지기는 했으나 몸집만 키운 무취의 재배나물과 할머니들이 산과 들에서 뜯어온 야생 나물을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니 강원도 정선이나 경기도 양평 오일장을 일부러라도 어슬렁거려볼 일이다. “한국인은 참기름만 주면 모든 풀을 나물로 무쳐 먹을 수 있으며, 나물을 먹는다는 것은 한국인의 생활 철학과 그 우주를 먹는 것”이라고 정의한 국어학자 이어령 박사의 말이 조곤조곤 귓가에 들려오는 봄날이다.

정갈한
사찰밥상

홍승스님의 사찰음식연구회’를 통해 사찰요리 섭생법을 전하는 홍승스님은 “스님들이 오래사는 이유는 운동과 명상, 정갈하게 살려는 마음가짐도 있지만 시간밥을 지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침은 부드럽게, 점심은 단단한 음식으로, 저녁은 간단히 꼭 제 시간에 먹는다는 것이다. 지금의 현대인들은 아침을 굶고 점심은 대충 때우며 저녁을 폭식하게 되니 문제가 생긴다며 정성껏 차린 음식에 대한 감사나 묵상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산세 좋은 곳 중심에는 어디든지 사찰이 있고, 들러서 물 한 모금 마시며 급한 숨을 돌리고 가는 것이 우리 정서 속의 절집이다. 공양시간에 들리면 운 좋게 수저를 드는 경우도 있으나 작은 사찰의 경우에는 여유롭게 밥을 하지 않아 절밥을 체험하기 쉽지 않다. 다만 미리 연락하면 ‘인사’정도로 사찰음식 경험이 가능하다. 비구승들이 거주하는 절은 따로 공양주를 두지 않고 스님이 직접 요리를 하기도 한다. 서울 진관사나 수원 봉녕사, 양산 내원사 노전암, 합천 해인사 약수암, 대구 동화사 부도암, 언양 성남사, 대전 동학사 등은 비구니 스님의 정성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근래에는 사찰마다 템플 스테이가 활성화되어 있으니, 가족단위로 1박2일이나 2박3일 머물며 마음을 다스리고 음식체험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흥승스님이 전하는 봄나물 맛있게 무치는 법

사찰음식은 겉절이 등 날로 먹는 것이 기본이며 그 외의 것들은 말려서 볶거나 데쳐서 무친다. 어찌보면 된장과 참기름만 있어도 되는 간단한 요리법이다. 서양 샐러드가 설렁설렁 양념을 ‘묻히는’ 것이라면 우리 겉절이는 손으로 ‘무치는’ 것이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손끝에서 음식 맛이 나온다고 여겼다.

나물을 무칠 때는 재료의 특징을 알면 좋다. 기본적으로 향이 강한 재료는 양념을 강하게 쓴다. 취나물은 데친 두부를 섞어 같이 무치면 좋고, 냉이는 된장, 어수리는 초고추장, 부지깽이나물에는 된장과 고추장, 씀바귀는 초고추장에 무친다. 참나물은 간장 간으로 충분하다. 봄나물들을 오래 보관하려면 간장과 식초, 설탕, 다시마 물을 이용해 장아찌는 담그면 된다.

글을 쓴 손현주는 음식 칼럼니스트이자, 여행 작가 겸 사진가로 20년간 잘 다니던 신문사에 홀연히 사표를 내고 2010년 안면도로 귀향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집에서 글을 쓰고 섬을 떠돌며 사진을 찍는다. 그녀는 앞으로도 꾸준히 책을 읽고 쓰며 사진을 찍는 삶을 꿈꾼다. 지은 책으로는 신작 『열두 달 계절 밥상 여행』을 비롯하여 『와인 그리고 쉼』, 『태안 섬 감성 스토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