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밥상 여행


뱃사람들이 고추장에 비벼먹던 음식

포항 물회

글/사진_손현주(음식 칼럼니스트)

나는 ‘밥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행복하다. 월남치마의 어머니가 토방을 건너와 마루를 거쳐 안방으로 들여놓던 김 모락모락 저녁밥상이 떠오르고, 온 가족의 젊은 얼굴이 스치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오남매...... 삼대가 함께하는 그 연대의 중심에는 늘 밥상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밥상문화를 찾기 어렵지만, 과거 어머니의 뜨끈한 밥상을 나는 여행지에서 맛본다. 지역에서 금방 건져 올린 싱싱한 재료가 조물조물 버무려 나오는 제철밥상을 보고 있자면 이것이야말로 현대인들이 그토록 찾아나서는 영혼의 음식이 아닌가 생각한다. 새해 첫 식도락여행은 그 건강한 음식을 찾아 바다 인근을 서성거려 본다. 철 지난 바다는 을씨년스럽지만 그만큼 호젓하여 낭만이 차오른다. 동해에서 막 떠오르는 일출을 보거나 섬으로 숨어들어 편한 사람들과 속 깊은 얘기를 하는 여행, 속 뜨끈하게 물메기탕 한 그릇 먹고 기운이 나 한 해를 힘차게 시작하는 그런 여행, 그 발걸음을 응원하는 고향의 건강한 음식들 같이 만나보도록 하자.

건어물

겨울 포항,
특히 신년에 떠나는
포항은 알차다.

‘한반도의 호랑이 꼬리’ 호미곶에서 새해 해돋이를 보고, 최백호의 노래 ‘영일만친구’를 흥얼거리며 동해를 끼고 장장 204킬로미터를 드라이브를 하거나, 구룡포 어느 귀퉁이에서 생물 아귀탕이나 과메기를 먹는 일.
코끝 빨개지도록 추운 바다를 휘돌아다니고 불쑥불쑥 포구 식당에 들러 맛보는 제철음식들은 그야말로 천국이다.

생선가게 할머니

글쎄, 포구에서는 쓴 소주나 진한 인스턴트커피가 없으면 안 된다. 포구 약국에서 ‘마시는 자양강장제’가 불티나게 팔리는 이유가 분명 있지 싶다. 어부들의 생이라는 것은 늘 그래왔다. 동트기 전, 빈 배에 몸을 싣고 먼 바다로 나가, 종일 흔들리는 배 위에서 중심을 잡으며 그물을 걷어 올리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몸을 각성시키는 물질이 없으면 견디기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를 타는 사람들은 마약처럼 그 일을 놓지 못한다. 밥벌이이기도 하겠으나 흔들리는 배를 떠나면 숨겼던 손 떨림이 드러나고 평탄한 지상에서도 흔들릴 것 같으니까.

그 고된 작업을 하는 어부들 일상 중 부러운 것이 우리는 딱 하나 있다. 막 잡아 올린 생선을 썩썩 썰어 끼니로 먹는 것이다. 고추장과 물만 들고 배를 타면 바다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 바다를 식탁으로 삼는 어부들의 음식 중 불을 켜지 않고 가장 손 쉬우며 맛있게 즐길 수 있는 것이 바로 물회 일 것이다. 갈증도 있으려니와 허기를 채우는데 그만이다. 금방 건져 올린 등 푸른 생선을 날렵하게 도려내 큰 바가지에 담고는 고추장 한 술 얹어 물을 붓는다. 설탕이 어디 있고 식초가 무슨 호사겠는가. 그냥 간을 맞추기 위해 고추장을 얹어 물을 붓고 휘휘 저어 훌훌 마시는 것이다. 남은 국물에 찬밥 한 덩어리 말아먹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그것이 어부들의 일상식 ‘물회’이다. 그리고 막 썰어 고추장 찍어 먹던 것이 말 그대로 ‘막회’다.

그런데 난 정말 뱃사람들의 전통 물회가 먹고 싶다. 멸치, 꽁치, 전어, 숭어 등 금방 잡아 올려 싱싱한 상태여야만 맛볼 수 있는 등 푸른 생선 막회가 먹고 싶다. 더 욕심을 부린다면 동네사람들이 한 잔 생각나 털신신고 드나드는 단골집이면 싶다. 수소문하여 찾아간 곳이 포항죽도시장에서 멀지 않는 전통 물회 집이다.
오랫동안 음식여행을 하다 보니 간판만 봐도 대략 감이 온다. 어렵게 주차를 하고 식당을 쳐다보니 시간이 느껴지는 네온사인이 손해는 보지 않겠다 싶다. 문을 밀고 들어서니 공간이 그다지 크지 않고,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른쪽에 열린 구조로 된 부엌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횟집 주방을 열어놓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주인을 자주 쳐다볼 수 있겠다. 아마 이런 구조는 주인이 동네에서 대포한잔 하러 온 토박이들과 이야기하며 회를 썰고 더 얹어주게 되는 ‘정(情)의 통로’ 역할을 할 것이다.
물회를 처음 먹는 사람들은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회에 물을 붓는다는 것 자체가 썩 유쾌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린내가 날 것 같다던가, 식감이 물컹거릴 것 같다던가, 이렇듯 나쁜 상상을 하다가 식욕을 잃기 십상이다. 동행한 막내딸과 기본으로 되어있는 일반 물회 두 그릇을 시켰다. 주인이 직접 상을 차려준다. 서비스로 내온 막회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미역과 야채를 깔고 등푸른 생선을 썰어 내왔는데, 캬, 정말 고소하다. 막회만 먹으러 와도 좋겠다. 회를 즐기지 않는 난, 맛보기로 내주는 막회만으로도 양이 찼다.
기대하던 물회가 나왔다. 잘게 썬 문치가자미회에 고추장 양념이 올라갔다. 엄마와 여행 온 딸아이를 기특하게 바라보던 주인 아주머니는 아예 옆자리에 앉아 버렸다. 식구들이 먹으려고 쪘다는 홍게를 내와 손으로 발라준다. 여느 집 물회와 형태가 달라 ‘맛있게 먹는 비결’을 묻자 아주머니는 다짜고짜 내 물회에 맹물을 벌컥벌컥 부어줬다. 물회를 먹어본 적 없는 딸아이는 물 속에 잠긴 회를 어떻게 먹어야 할지 내심 걱정하는 눈치다.
젓가락으로 쓱쓱 뒤집어 고추장과 섞고, 회를 건져 먹다가 밥을 두어 수저 말아 후루룩후루룩 퍼먹었다. 담백한 회와 밥, 고추장의 맵고 텁텁한 맛이 기교 없이 어우러지는 순수한 물회다. 날씨가 더울 땐 물 대신 서걱서걱하게 간 얼음을 내준다. 얼음이 녹아가며 자박자박 적당하게 물회의 농도가 맞아 들어간다. 물의 양 조절에 자신 없는 물회 초보자들은 주인 도움이 필요할 듯하다. ‘치우치지 않고 적당하다’는 것은 늘 맛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요즘 양념이 자극적인 물회 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 물회가 맛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식초를 타먹도록 배려는 하지만, 이 집에서 권하는 전통 뱃사람들의 물회는 이렇게 단순하고 수더분한 ‘고추장 물회’다.

글을 쓴 손현주는 음식 칼럼니스트이자, 여행 작가 겸 사진가로 20년간 잘 다니던 신문사에 홀연히 사표를 내고 2010년 안면도로 귀향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집에서 글을 쓰고 섬을 떠돌며 사진을 찍는다. 그녀는 앞으로도 꾸준히 책을 읽고 쓰며 사진을 찍는 삶을 꿈꾼다. 지은 책으로는 신작 『열두 달 계절 밥상 여행』을 비롯하여 『와인 그리고 쉼』, 『태안 섬 감성 스토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