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과 다름없이 집에서 식사를 준비한다. 양념장을 배어 넣느라 불고기를 조물조물 무치는 손길이 분주하다. 불고기 맛의 핵심은 단연 간장. 뜨겁게 달군 팬 위에 고기를 올리자 “치이이익―” 소리가 터지며 간장이 가열되면서 깊은 풍미를 발산한다. 그 옆에서는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며 다 되었다는 신호를 보낸다. 구수한 된장 냄새는 차가운 가을 공기 속으로 은은하게 번져나가고, 부엌 가득 퍼지는 향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어느새 식욕이 고개를 든다.
드디어 불고기와 된장찌개가 식탁에 올랐다. 오늘도 간장과 된장의 덕을 톡톡히 본 푸짐한 한 끼가 완성된 것이다. 문득 생각해보니, 간장·된장·고추장, 이른바 한국의 3대 장을 쓰지 않고 밥상을 차린 적이 있었던가 싶다. 늘 우리 식탁을 든든히 지켜온 이 장들은 단순한 양념 그 이상이다. 이제는 이 특별한 음식들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볼 차례다.
장, 음식 그 이상의 의미
2024년, ‘장 담그기’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2013년 김장문화에 이어 두 번째로 등재된 한국의 전통 음식 문화다. 주목할 점은 음식 자체가 아니라, 콩을 발효해 장을 담그는 과정이 평가 받았다는 것이다.
장에 대한 한국인의 애정은 속담에도 잘 드러난다. “장이 달면 복이 든다”, “장맛이 변하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말처럼, 장맛은 집안의 길흉을 좌우한다고 여겼다. 심지어 “며느리가 잘 들어오면 장맛이 좋아진다”는 말도 있었다. 장 하나로 집안의 운세와 가문, 사람됨까지 평가했을 만큼 장은 단순한 조미료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이는 발효음식이 중심인 한식 문화에서 장맛이 곧 음식 전체의 맛과 가족의 건강을 좌우했기 때문이다. 장이 맛있으면 집안의 기운이 살아나고, 그렇지 않으면 반대로 기운이 꺾인다고 믿었던 것이다.
시간과 정성이 빚어낸 발효의 마법
그렇다면 장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시작은 언제나 작은 콩이다. 삶은 콩을 빚어 메주를 만들고, 짚으로 묶어 말리며 자연 발효가 일어난다. 완성된 메주는 깨끗이 씻어 소금물과 함께 장독에 담는다. 숯이나 붉은 고추를 함께 넣어 잡균을 막는 지혜도 담겨 있다.
어두운 장독 속에서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흐르면, 위에는 맑은 간장이, 아래에는 걸쭉한 된장이 차곡차곡 익어간다. 오롯한 기다림과 정성, 그리고 지혜와 과학이 합쳐져 한국의 장이 완성된다. 작은 콩이 이렇게 변신한다는 사실은 늘 경이롭다.
장과 함께 동고동락한 우리 민족
그렇다면 왜 우리 민족은 이토록 장을 담그는 데 열중했을까? 그 해답은 당시의 환경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농경 사회였던 조상들은 동물성 단백질을 구하기 어려웠다. 자연스럽게 단백질이 풍부한 콩을 중요한 식재료로 삼았지만, 여름철의 무더위와 습기는 콩을 쉽게 상하게 만들었다. 결국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고, 그 지혜가 바로 발효였다. 이렇게 콩은 간장과 된장으로 거듭나며 우리의 밥상을 지켜주었다.
장에 얽힌 역사는 유구하다. 삼국시대 기록을 보면 이미 간장과 된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문왕이 왕비를 맞이할 때 보낸 폐백에 메주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대목이 있다. 이는 당시 왕실에서도 장이 귀하게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국왕이 혼례 예물로 메주를 보낼 정도였으니, 메주가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라 귀중한 가치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도 장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흉년이 들거나 전쟁이 일어나 백성이 굶주리면, 국가는 구호품으로 메주를 나누어 주었다. 백성들은 이를 장으로 담가 나물을 무치거나 국을 끓이며 굶주림을 견뎠다. 메주는 단순한 먹거리 그 이상으로, 위기의 순간 생명을 지켜주는 구호식품이었던 셈이다.
조선시대에는 장의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왕실에는 장을 보관하는 전용 창고 ‘장고’가 있었고, ‘장고마마’라 불린 상궁이 이를 관리했다. 심지어 왕의 식사를 전담하는 ‘합장사’라는 관직까지 두어, 왕이 궁궐을 떠날 때에도 미리 가서 장을 담그게 했다. 왕이 어디를 가든지 장을 반드시 먹어야 했다는 사실은, 장이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라 왕의 건강과 식탁을 책임지는 필수품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장은 그저 수많은 음식 중 하나가 아니었다. 민초들의 삶 속에서는 생존을 지켜주는 방패였고, 왕실에서는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음식이었다. 다시 말해, 장은 우리 선조들의 일상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으며, 삶의 질서와 안녕을 지탱해 준 소중한 존재였다.
장은 담그는 사람의 손길과 기다린 시간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그래서 집집마다 다른 장맛이 있고, 그 안에는 가족의 역사와 전통이 켜켜이 쌓여 있다. 작은 콩에서 시작된 이 위대한 발효의 역사가 이제는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앞으로 한국의 장이 또 어떤 모습으로 발전해 나갈지 기대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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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소개 푸드 칼럼니스트 이주현
영양사 출신의 요리 연구가 및 푸드 칼럼니스트로서 쿠킹 클래스, 인문학 강의, 방송, 심사의원까지 다채롭게 활동 중이다.
한국일보 <이주현의 맛있는 음식인문학>외 다양한 칼럼을 통해 음식에 대해 재미있게 알려주고 있다.